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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 더해주는 'X파일'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홍준형
MBC TV의 ‘안기부 X파일’ 공개는 충격적이다 못해 해괴하다. 찌는 무더위에 시달리다 사람들은 이 난데없는 추악한 납량특집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다. 문제는 지금 세 가지 갈래로 전개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공개된 도청 내용이 충격적이다. 현 주미대사인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이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장(현 부회장)을 만나 신한국당 이회창 대통령후보 등 대선후보들에 대한 자금제공 방안을 논의한 내용, 전·현직 최고위급 검찰 간부들에 추석 떡값 제공 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유수의 중앙일간지 사주와 초일류 재벌기업의 간부가 대선후보들과 검찰 고위간부들에게 뇌물성·보험성 금품 제공을 숙의했다는 사실은 아직도 기억이 새로운 2002년 대선 관련 ‘차떼기’ 사건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다.
두번째는 국가정보기관에 의해 일상적으로 자행된 불법도청의 문제이다. 국가정보기관이 정·관·재계 및 언론계, 종교·사회단체 지도자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상시 도청을 해왔고 이를 통해 정치에 개입해 왔다는 세간의 의혹이 이번 일을 기화로 사실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그런 정보기관의 정치공작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인가, 아니면 아직도 계속되는 음지의 비즈니스인가 의문이 고개를 든다.
세번째는 이번 ‘X 파일’ 공개에 따른 정부 차원의 대응조치의 문제이다. 이런 류의 사건이 터지면 으레 언론이나 정치권, 시민단체, 네티즌들로부터 진상규명의 요구가 대두되고 검찰과 국정원, 국회 등 국가기관들이 불려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검찰의 경우 범죄가 되는 사실과 그와 관련된 부수사실에 대해서만 그것도 공소시효라는 제약 아래서 수사할 수 있다는 데 한계가 있다. 어차피 종당에는 국회가 청문회 등을 통해 이 사건을 처리할테지만, 현재 정치권에서는 문제가 더 크게 불거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듯한 조짐이 관측되고 있다.
결국 불법도청의 당사자인 국정원이 원의 명운을 걸고 진상을 규명할 일이겠지만, 당사자로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자세에서 모든 의혹을 속속들이 해명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불법도청을 통한 것이고, 또 공소시효가 지난 일일지라도, 이번에 불거진 의혹들을 해소하기 위하여 진실규명의 책임이 정부에게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현재 사건 당사자인 홍석현 주미대사의 거취문제를 검토하는 수준에서 이 사건이 마무리되기를 바란다면 ‘X 파일’ 공개에 따른 정치적 이익만을 챙기겠다는 또 다른 의혹에 휩싸일 수도 있다. 특히 ‘X 파일’ 공개의 배경과 의도를 국민 대다수가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히 밝혀야 한다. 테이프 자체의 신빙성 여부를 가리는 일은 조작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명료하기 때문에 그리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녹음 내용이 공개된 마당에 신빙성에 토를 달기 매우 어렵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X 파일’ 공개의 배경과 의도를 밝히는 데 있다.
법정에서는 불법으로 수집된 증거의 증거능력을 박탈함으로써 실체적 진실발견보다 피의자의 인권보호를 우선시킨다는 증거법 원칙이 적용된다. 반면, 공론의 포럼에서는 진실을 폭로한 배경과 의도보다는 그 진실의 심각성이 우월하게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폭로된 사실의 심각성에 사로잡혀 신빙성 문제나 폭로의 배경과 의도 문제를 소홀히 하다가는 자칫 더 큰 화를 부를 수도 있다.
8000개에 달한다는 테이프 가운데 하필 이것만 언론사에 제공한 이유가 무언지, 누가 왜 지금 폭로했는지, 다른 숨은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파일을 보도한 언론사의 책임 추궁, 검찰수사나 관련인사의 처벌·징계 등 후속조치는 그 다음 일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국정원 등 각종 정보 및 수사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기관들이 행여 정치적 정보공작을 하지 못하도록 확실한 사후보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2005/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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