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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즘의 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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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즘의 윤리
김동명 金東鳴(1900∼1968)
시인. 강원도 명주 출생. 호는 초허(超虛) 1908년 원주에서 보통 학교를 나왔으며, 함흥 영생 중학을 졸업한 후, 흥남·평남 강서 등지에서 교편 생활을 하였다. 1923년 <개벽> 10월호에 보들레르에게 바치는 시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시면》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이래 계속해서 작품 발표를 했다. 1925년에 도일하여 아오야마 학원 신학과를 졸업한 후 귀국, 1930년에 첫 시집 《나의 거문고》를 발표하였다. 이후 제2시집 《파초》를 간행하였는데, 《파초》는 남국을 떠나온 파초와 조국을 잃은 자신의 향수를 융합시켜 노래한 훌륭한 작품으로 길이 남았다. 1947년에 월남하여 이화 여대 교수 및 참의원 의원 등을 지냈다. 월남 이후에는 과거의 시풍과 서정성에서 벗어나 정치·사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신문·잡지에 정치에 관한 평론을 많이 집필하였다. 시집으로 《삼팔선》 《하늘》《진주만》이 있으며 수필집 《세대의 삽화》가 있다, 1965년 3권으로 된 《김동명 문집》이 간행되었다.
적어도 현대에 있어서 테러는 어떠한 경우에서든 통치 혹은 지배의 한 방식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것은 테러리즘의 지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것의 고도한 지능화.기술화를 이름이다.
이른바 독재 정치란 결국 테러 정치의 동의이명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렇다고 폭도들에게 흉기를 쥐어 가지고 백주에 소동을 일으키게 할 필요까지는 조금도 있음직하지 않다. 왜냐 하면, 적들은 원하기만 한다면 소위 법이란 이름으로 불려지는 몽둥이로 얼마든지 저들의 반항자를 때려 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 이래의 저 무자비한 소련식 테러-소위 숙청이란 명목 아래서 행해지는-를 말하더라도, 언제나 법정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 하심(賀心) 타인소시(他人所視)에 볼썽사납게 주먹을 휘두르며 덤벼들어야 하느냔 말이다. 하나 융통자재한 법(法)으로까지 어찌 낼 도리가 없을 경우엔 폭력이라도 내대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한다면 우리는 그저 껄껄 웃고 어서 지옥문이 열리기나 바랄 뿐이리라.
사실 말이지 법을 이리 휘고 저리 비틀어 가죽채 모양 내두르는 데도 사뭇 기겁을 할 지경인데, 여기에 폭력마저 덧짐치기로 한다면 그야말로 숨을 어떻게 쉬란 말이냐.
어쩌면 테러가 역사에 적혀진 시초일지도 모르는 저 옛날 박랑사에서 진시황을 겨눈 철퇴의 내력을 들어본대도 테러는 역시 약자(弱者)의 무기임이 분명하다. 과연 테러는 어디까지나 약자, 즉 피압박자(被壓迫者)가 강자, 즉 억압자에 대한 항쟁 수단으로써만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테러는 비로소 하나의 윤리 문제와도 결부될 수 있다.
법에 있어서도 정당 방위를 위해서는 어떠한 폭력(暴力)의 행사도 용인될 수 있는 것처럼 테러 행위가 정당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우선 정당방위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살기 위한 투쟁이라야 한다. 여기에 테러의 윤리가 있고, 그러므로 그것은 약자의 무기요, 또 복수의 무기일 밖에 없는 스스로의 엄연한 제약성이 있음도 물론이다.
그것은 실로 하나의 커다란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한 조그마한 폭력의 행사를 의미하는 것이고, 또 그런 것이라야 한다.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도 안중근. 윤봉길 등 여러 의사(義士)들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테러 행위가 또 하나의 윤리(倫理)를 주장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의(大義)에 철(徹)하기 위한 필사 투쟁으로서의 실천이 아니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대의를 살리기 위한 초비상 수단으로의 만부득이한 조치라야 한다. 워낙 향기롭지 못한 소생이고 보니 더욱 그 명분은 뚜렷해야 하고 준엄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만일 이와는 반대로 테러 행위가 살기 위하여, 또는 정의의 옹호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권력의 유지나 신장을 위한 하나의 정치적 수단으로 행해진다면, 그것은 실로 천인이 공노할 폭행일 뿐임은 두말 하잘 것 없다. 우리들이 예의 독재 정치를 극도로 혐오하고 저주하고 거부하는 것은 그것은 실로 테러리즘에 의한 정치임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들마저 어떠한 경우에든 저들의 방해자를 처치하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법의 올가미를 내대일 뿐, 직접 폭한(暴漢)을 등장시키는 일은 별로 없다. 법은 어떠한 경우에든 저들을 위하여 가장 편리한 몽둥이가 되어 줄 수 있기 때문이리라.
하나 서투르고도 성급한 햇내기 독재자들 가운데는 아직도 폭력의 직접적인 효용에 크게 구미를 느끼는 축들이 있을지 모르나, 권력층에 의한 폭력의 직접 행사란 결국 따져서 실득(失得)이 어떻게 되느냐는 것 따위는 차치하고라도, 우선 그 추태인 점만으로도 차마 눈뜨고는 못보아줄 것임에 분명하다. 명령 여하에 손이 되고 발도 되어 줄 수 있는 형리 옥졸이 간 데마다 예예 하고 대령하는 판에 무엇이 모자라서 흉기를 휘두르며 소동을 일으켜야 하느냐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테러는 어디까지나 약자,즉 눌리움을 받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무기임을 주장한다. 일찍이 저 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세르비아 청년의 발포가 그렇고, 지남 봄 미 국회에서의 폭발물 소동이 또 이것을 말해 준다.
인도인에게 테러를 당한 영국인은 얼마든지 있으나 영국인들로부터 테러를 당한 인도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들은 일이 없다. 더 가까이 우리의 경우에서 본다면 일찍이 일제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총격을 가한 우리의 의사(義士)들이 있음을 자랑하되, 우리의 항일 투사들을 습격해 온 일인(日人)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들은 법하지 않다.
전자들은 폭력에 직소하지 않는 한 분을 풀 길이 없기 때문이요, 후자들은 구태여 직접적인 폭력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테러가 어디까지나 약자의 무기라야 한다는 말은 그것은 약자의 손에 쥐어졌을 때에 한해서만 비로소 명분이 설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테러가 약자에 의해서 행사되는 경우는 심히 희귀하다. 그것은 가위 살신성인(殺身成人)의 각오를 필요로 하는 일종의 자폭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때로는 윤리 이상으로 엄숙하기도 하다. 그러나 또 테러가 강자, 즉 지배자에 의하여 행사되는 경우는 더욱 희귀하다.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비겁, 아니 파렴치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정치 지도자로서는 정신 분열증에 걸리지 않는 한 이렇게까지 우매한 짓들을 하려 들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묘혈을 파는 따위의, 그렇다, 폭력을 쓰는 자 폭력으로 갚아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테러는 이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도 그다지 말썽거리가 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도 그럴 밖에 없는 것이, 약자는 약자이니 섣불리 손을 댈 수 없는 일이요, 강자는 또 강자이니 애초부터 이기고 앉아 질 싸움-도의적으로-을 걸잘 까닭은 없는 일이고 보니 자연 무풍 상태일 밖에.
그러나 여기에 단 하나의 예외(例外)가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조국 대한 민국이 그것이다. 건국 10년의 역사가 그대로 테러의 역사라면, 18세기 프랑스 혁명 시대 이래의, 그리고 또 러시아의 허무당원 시대 이래의 세계사적 사실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동안 테러에게 바친 우리의 희생이 얼마나 크고 비참했던가를 생각해 보라. 사뭇 복통이 터질 일이 아니냐? 혼란의 시기로 알려진 군정 시대는 또 군정 시대의 일로 돌린다 치더라도 대한 민국이 선 뒤에 조차 저 고약한 습벽이 가시기는커녕 오히려 더 폭위를 떨치고 있으니 대관절 어찌된 영문이냐?
일찍이 공산당의 테러는 저들의 생리와 습성으로 보아 이미 각오했던 바요, 한독당계의 테러에 이르러서는 따 논 대권을 잡기 위한 원모(遠謨)였고 보니, 본시 고색창연한 저들에게는 있음직도 한 일이었다고 할까. 그리고 우리의 우익계 청년단에 의한 테러 행사로 말하면 불공대천(不共戴天)의 구적(舊敵)을 눈앞에 그저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인즉 명분이야 떳떳하지 않으냐?
그러나 대한 민국이 선 뒤에 조차 저 숱한 테러단이, 마치 세상은 내 것이란 듯이 땃벌떼처럼 잉잉거리며 돌아가니, 대관절 이것들은 누가 길러 내놓은 몽둥이들이며, 또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꿍꿍이판이냔 말이다. 기껏 한다는 짓들을 보면 자유 민주 국가인 대한 민국에서 자유 분위기의 파괴를 위하여 극성을 부리거나, 민주 언론의 도살을 위하여 생마 같이 날뛰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테러단이 이렇듯 반민족.반국가적인 테러단이, 그러면서도 그 활동이 이렇듯 ‘자유로울’ 수 있는 테러단이 다른 하늘 밑에도 있을 수 있을까?
이렇게도 대담하게 역사를 두려워할 줄 모른다는 것은 진정 하나의 행복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억하라, 폭력이 권력과 결부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경우를 일러 공포 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굳이 유취만년(遺臭萬年)의 소원이 아닐진대 어찌 재사(再思)할 바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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