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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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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적 필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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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088
[다시쓰는 필화사]

김지하의 「오적」과 「비어」, 그리고 그 이후

이경수 / 문학평론가


유신정권과 김지하 시인의 악연이 시작되는 것은 「오적(五賊)」 필화사건으로부터였다. 판소리를 창조적으로 계승한 담시라는 형식으로 김지하는 당시의 사회 현실을 풍자한 시 「오적」을 1970년 5월 『사상계』에 발표한다.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을 가리키는데 나라를 망치는 다섯 명의 도적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을사오적’을 연상시킨다. 나라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개인의 영달을 위해 힘없는 사람들을 짓밟고 나라의 운명을 망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것은 당시의 한국 사회의 현실을 겨냥한 것이었다.

1970년은 이듬해로 다가온 양대 선거를 앞두고 야당이 여당에게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던 시기였다. ‘정인숙여인사건’을 비롯해서 호화주택, 도둑촌 등에 대한 이야기로 여당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획책하며 유신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준비를 가동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그즈음 김지하의 담시 「오적」이 발표된 것이다.

『사상계』에 발표되었을 때만 해도 책이 압수되거나 한 것은 아니었고 김지하 시인에게 의례적인 경고가 주어졌을 뿐이었다. 사건은 그렇게 무마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의 기관지 『민주전선』 제40호(1970년 6월 1일자)에 「오적」이 전재되면서 당국이 이를 문제 삼아 오늘날 알려진 「오적」 필화사건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1970년 6월 2일 새벽 1시 50분경 당국은 경찰을 관훈동 신민당사에 투입,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을 압수하고 『민주전선』의 주간 김용성을 연행하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민주전선』의 편집위원 손주항, 『사상계』의 발행인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 시인 김지하 등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연행된다.

이 사건의 재판과정에서 「오적」에 대해 각계 인사 및 문인들의 감정을 받기도 했다. 당시 고려대학교 교수로 있던 이항녕은 “이 시가 공산주의의 계급사상을 고취시켰다는 인상을 받지 않았으며, 다만 민주주의의 병폐인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증언했으며, 감정인으로 출석한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 선우휘도 “이 시는 어떤 개인을 악의를 갖고 비방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부정부패를 보고 그에 대한 공분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고 증언하였다.

덧붙여 “시는 시로 감상해야지 시로 보지 않고 문학적 목적성을 따지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역시 감정인의 자격으로 출석한 시인 박두진 역시 “「오적」 시 정도의 풍자와 고발은 조금도 부당하거나 공공질서를 해치거나 국민의 기본권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 아니”며, “작가적 책임과 사명을 자각하는 문학자라면 「오적」 시 정도의 표현은 당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증언하였다(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2』, 역사비평사, 1992, 77∼78쪽).

그러나 이러한 증언과 감정에도 불구하고 1972년 12월 20일 서울형사지법은 다음과 같이 선고한다. “김지하 피고인의 담시 「오적」을 게재한 것은 특권층의 부정부패를 응징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피고인들이 주장하고 있으나 그 빙자의 도가 너무 지나쳐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담시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계급의식을 조성, 북한의 선전자료에 이용되었으므로 유죄로 인정,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할 것이나 피고인들의 정상을 참작, 형을 유예한다.” 반공법 위반을 사실상 인정한 판결이었던 것이다.

김지하의 「오적」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데, 마치 평탄치 않을 시인의 앞날을 예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신에게 닥쳐올 시련을 예감하면서도 「오적」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의 심정을 훗날 시인은 “오적이 있으니까 오적을 썼다”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겄다.
―김지하, 「오적」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김지하 시인이 옥편에서도 찾기 힘든 희귀한 한자를 써서 이들 오적을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한자의 대부분은 짐승을 뜻하는 말들이다. 공판에서도 그 의도를 묻는 질문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김지하는 다섯 도적을 옥편을 찾아야 겨우 알 수 있는 어려운 한자로 표기한 것은 교묘히 법을 피해 저지르는 이들의 부정부패가 보통사람들의 눈으로 투시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이 잘 알아보기 어려운 한자로 쓴 것이며, 다섯 도적을 짐승이름을 뜻하는 한자로 표기한 것은 범죄행위 자체를 추상적으로 지칭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이어지는 시 「오적」은 다섯 도둑의 악행을 차례대로 묘사해나간다. 가령 재벌은 “저놈 재조봐라 저 재벌 놈 재조봐라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초치고 간장치고 계자치고 고추장치고 미원까지 톡톡쳐서 실고추 파 마늘 곁들여 날름 /세금받은 은행돈, 외국서 빚낸 돈, 왼갖 특혜 좋은 이권은 모조리 꿀꺽” “천원공사 오원에 쓱싹, 노동자임금은 언제나 외상외상 /둘러치는 재조는 손오공할애비요 구워삶는 재조는 뙤놈숙수 뺨치”는 인물로 그려진다. 다섯 도적의 악행은 법의 심판도 교묘히 피해간다.

이들의 죄를 엉뚱하게 뒤집어쓰는 것은 돈 없고 힘없는 꾀수라는 인물이다. 「오적」에서 꾀수를 무고한 포도대장과 오적들은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을 맞아 죽거나 피를 토하고 죽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현실 속의 큰 도적들은 버젓이 권력의 향연을 즐기고 있다.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지하는 판소리의 기법을 차용한 담시라는 형식을 통해 당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시인으로서 응당 할 수 있는 양심선언을 한 셈이다. 그는 자살이 아닌 풍자를 선택함으로써 그 결과야 어찌 되든 쓰고 싶은 이야기는 쓰는, 시인으로서의 자유와 자존심을 지켜낸다.

『사상계』에 실렸을 때만 해도 경고 조치로 끝낸 「오적」에 대해 야당 기관지에 실리자마자 당국이 반공법 위반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씌운 데는, 그것을 빌미로 야당인 신민당의 세력을 약화하고 언론을 통제함으로써 유신체제의 기틀을 마련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사상계』는 등록이 취소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한편 「오적」 필화사건으로 기소 중에 있던 김지하 시인은 1972년 3월, 가톨릭교회 종합잡지 『창조』 4월호에 「비어(蜚語)」라는 담시를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 혐의로 다시 입건된다. 그 후에도 김지하는 민청학련사건, 옥중수기 「고행-1974」 사건 등으로 여러 차례 실형을 선고받고 옥중에서 고초를 치른다. 유신정권의 혹독한 고문과 탄압도 한 시인의 붓을 꺾지는 못했던 것이다. 1970년대는 이렇게 한 시인을 혁명가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율려운동의 뿌리는 생사를 넘나들던 옥중 체험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70년대의 김지하와 2000년대의 김지하 사이에는 짧지 않은 거리가 느껴지고, 그는 이제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살림’의 생명운동을 주창하며 자신의 신념을 향해 불굴의 의지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에서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가는 시인의 얼굴이 여전히 어른거린다.

다만, 생명 문화 운동을 통해 개벽의 꿈을 지속하고 있는 김지하 시인이 언젠가는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날카로운 붓끝을 회복하는 그날이 오기를 몰래 꿈꾸어본다. 70년대가 시인마저 혁명가이기를 요구하던 시절이라면, ‘지금, 여기’는 진정한 시인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운 시절이기 때문이다.


* '오적'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평론가 '이경수' 님의 글을 옮겨왔습니다.